편지로 이어진 인연
독자투고 서동필 독자
중학교 기술 시간에 만든 트랜지스터 라디오 한 대가 있었다.
열심히 납땜하고 조립하며 만들어 제법 주파수도 잘 잡히는 그럴싸한 라디오였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이성에 관심을 보이던 그 시절 밤마다 듣던 그 라디오는 내 애인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 중 인기방송이었던 <이승연의 FM 데이트>는 빼놓지 않고 열심히 들었는데, 어느 날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중3 여중생의 고민 사연이 흘러 나왔다. 당시 내가 느꼈었던 고민과 너무나도 같아서 상품 소개 때 흘러나온 주소를 나도 모르게 문제지 여백에 적고 있었다.
그때는 모든 방송에서 사연자의 주소를 제대로 읽어주던 시기였다.
다음날 바로 팬시점에서 편지지와 봉투를 구입하여 소녀에게 편지를 썼다.
무슨 내용을 썼는지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애타게 기다린 그녀의 첫 답장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라디오에서 사연으로 만난 오빠가 왠지 저의 잃어버린 오빠 같아서 고민하다 답장을 보냅니다."
첫 답장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후 답장을 기다리는 행복에 날마다 대문 편지함을 바라보았고, 실제 만날 수는 없었지만 난 그녀에게 남자친구 같은 친오빠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사는 곳은 대구, 내가 사는 곳은 순천이었기에 감히 만남을 생각할 수도 없는 거리였고 시기였다.
편지를 쓰고 우체국에 가서 당시 보통우표로 널리 판매되던 곤충시리즈 우표를 구입해서 부치고 다시 답장을 받기까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지금이야 SNS로 실시간 소통이 가능하지만 당시에 그녀와 나의 메신저는 우표였다.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동안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곁이 되어주는 소중한 상상속 연인이자 오누이가 되어왔다.
1996년 그녀가 드디어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됐고, 우린 서로 말은 안했지만 첫 만남을 그리며 기대하고 있었다.
대구시외버스터미널에서 편지를 주고 받은 지 5년 만에 그녀를 만났다.
어색함도 5분쯤 지나니 반가움과 그리움으로 변해,
우린 지난 서로의 얘기들을 기쁘게 들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첫 만남 이후로 편지 대화는 사라져갔다.
서로의 바쁜 삶에 편지는 후순위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나는 군대에 입대하고 머지않아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결혼 소식을 알렸을 때 누구보다도 축하해줬던 그녀였다.
그녀와는 이성으로 만났지만 끝내 애인 관계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내가 친오빠 같은 존재였고, 나 또한 친여동생 같은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결혼 후 1년쯤 지났을 때 그녀에게서 다급한 연락이 왔다.
그녀의 어머니가 위중하신데 나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하신다는 얘기였다.
실로 오랜만에 대구를 찾아 중환자실에 누워 계시던 초췌한 그녀의 모친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녀의 어머니께서 마지막 기운을 짜내어 내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오늘 자네를 처음 보는데 꼭 먼저 간 내 아들 같네! 우리 딸을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오빠로서 잘 부탁하네."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메어 대답을 겨우 드렸다.
그제서야 어머니는 안도하시는 듯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
라디오 사연으로 만나 우체국을 수도 없이 드나들며 서로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 주었던 편지들!
영호남 저편 끝에서 우리를 이어줬던 편지뭉치들을 보며 지난 세월의 추억에 잠긴다.
그녀도 얼마 후 결혼하여 한 가정의 아내가 되었고 난 어머니의 유언대로 오빠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12년 전쯤 그녀의 연락처가 바뀌면서 소식이 끊겨버렸다.
행여나 연락이 오지 않을까 번호를 바꾸지 않고 계속 기다리지만 그녀를 더 이상 볼 수도, 연락할 수도 없다.
나의 청소년기를 아름답게 꾸며 주고 지켜 주었던 ㅇㅇ아.
이 글을 보면 꼭 연락주렴.
그럼 네게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편지 한 통 쓰고 싶구나!
이 글은 월간지 "우표" 2019년 6월에 실린 글이다.
감명있게 읽어서 제 블로그에 글을 올린다.
월간지 "우표"는 (사)한국우취연합에서 발간하고 있으며,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 (서린동) 광화문우체국 10층에 있고,
전화는 02-393-0161, 393-5117
팩스는 02-393-7223
홈페이지는 www.woopyo.net이며
우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알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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